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질문에 정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철학적 고찰을 통하여 어느 정도 수용가능한 답은 내릴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글에 이어 인생의 의미를 제공하는 유력한 후보인 이타주의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미래의 목표나 목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설명하는 '목적론적' 설명을 살펴보았는데, 인생의 목적이 미래에 있다면 죽음과 더불어 그 목표가 완수되지 못하거나, 목적 완수 이후에는 삶이 공허해질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하며, 따라서 인생의 불완전함을 견디고 지금 이 순간의 현실성을 받아들여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 중 널리 알려진 이타주의(남을 돕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을 도우며 인생의 의미가 목적을 얻게 되었다고 느낍니다. 테레사 수녀를 비롯한 수많은 봉자들과 이타주의자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타주의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본질적이면서도 유일한 방법일까요?
먼저 이타주의가 과연 누구를 돕는지를 알아봅시다. 이타주의는 도움을 받는 사람을 돕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주의는 도움을 주는 사람 자신에게도 유익하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봉사자를 모집하는 광고 전단지에는 '남을 위해 일하며 기쁨을 느끼시겠어요?', '타인을 위한 변화를 이루어내면,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변화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등의 구절이 발견됩니다.
기본적으로 이타주의는 도움이 필요한 삶을 돕습니다. 삶이 질이 좋아지는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뿐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도 선합니다. 즉 도움을 받는 사람이 극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빈곤하게 살지 않는 것도 선입니다. 그렇다면 이타주의는 그 자체로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타주의(남을 돕는 행동)는 사람들을 끔찍한 처지에서 건져내거나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는 것(목적)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돕는 행동 자체가 선이고 인생의 의미를 제공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먼저 남을 돕는 사람만이 유의미한 삶을 산다고 한다면,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이타주의자가 베푸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많은 영화나 소설은 이타주의가 이타주의자를 구원하는 방식을 칭송하고 도움을 받는 인물에게는 거의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삶이 유의미해지려면 모두가 서로를 돕는데 참여해야 하므로 이타주의가 끝없이 순환하게 됩니다. 필요 없는 도움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타주의가 성공을 거둔 순간 이타주의는 불필요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의 필요가 충족되면 이타주의 행위는 필요 없어집니다. 그러나 남을 돕는 과정 자체가 주된 목적이 되면 남을 너무 잘 도와서 더 이상 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목적 없는 채로 삶을 마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성공적인 이타주의는 자신의 목적을 좌절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매우 흥미로운데요, 돌보는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피보호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베푸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지속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피보호자가 독립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도 결코 아니지요.
이타주의가 진정으로 성공하는 것은 도움을 줄 필요가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소멸하는 상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종종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돕는 위대한 이타주의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에게 가능한 최선을 결과를 가져오기 위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기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돕기 위해 항상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바람직은 일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좋은 삶을 누리는 상황이며, 그래서 남을 도울 필요가 없어지는 상황입니다. 이타주의적 실천을 훌륭한 삶의 태도이지만, 이타주의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보고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것은 주의하여야 합니다.
이타주의는 삶의 의미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남을 돕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지, 자선 자체를 위한 자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장에서는 개별자의 이익과 종의 이익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고: Julian Baggini, What's it all about? Philosophy and the Meaning of Life, 2002, 2017(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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