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살면서 한번 정도는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질문에 정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철학적 고찰을 통하여 어느 정도 수용가능한 답은 내릴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어떠한 단위에서 추구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남을 돕는 행위 자체에 두는 것은 오히려 타인을 나의 목적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므로 인생의 목적이 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타주의 도구로 삼아 타인과 나의 삶을 나쁜 상황에서 건져내고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인생의 의미를 어떠한 단계/수준에서 논의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타주의는 개개인을 일대일 혹은 대규모로 돕는 일입니다. 반면, '종의 이익' 관점에서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다른 종류의 실체인 '종'입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집니다.
종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개인을 돕지 않고서도 종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주비행사 암스트롱(Neil Armstrong)은 이타주의자는 아니지만 달에 착륙함으로써 인간 종의 진보에 기여하였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삶의 목적은 개인의 이해와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공받는 이익과 이익을 제공하는 사람들 사이에 비대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과연 종은 개개 구성원의 합일뿐일까요, 아니면 그 개개 구성원들과 구별되는 실체일까요? 종은 개체들의 집합되는 다른 어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체들을 넘어 그 위에 존재하는 실체는 아닙니다. '인간종'에 대한 설명이 인간종에 속하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참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종은 진보한다'는 주장이 참이라도, 어떤 인간 구성원은 진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개별 인간과 전혀 다른 실체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를 인간 종 전체의 진보와 번영으로 여긴다면 좋을까요?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 종의 진보가 된다면 우리는 개미집단 안의 개미와 다를 바 없어집니다. 집단의 목적은 가지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중 극소수인 여왕개미만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일부 개인이 희생되어도 집단은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가게 됩니다. 개인의 중요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집단적 목적을 얻게 됩니다.
인생의 목적을 종의 이익으로 간주하는 것은 모호하고 의심스럽습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들의 희생을 당연시하였던 나치즘과 같은 역사를 생각해 보세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는 개인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서 삶의 의미가 개인 자신의 이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인간 종)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점은 우리가 추상적 개념인 인간 종의 안녕을 종에 속한 구성원인 개인의 안녕보다 우위에 두는 것의 위험성입니다. 사람은 고통, 기쁜, 사랑, 쾌락을 느낄 수 있으나 인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배우고 생각하고 발전할 수 있으나, 인류는 오직 비유적으로만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생의 목적인 '행복'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Julian Baggini, What's it all about? Philosophy and the Meaning of Life, 2002, 2017(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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